📘 매클루언이 말한 ‘시간’이란 무엇인가?
— 미디어가 만드는 시간의 구조
우리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으로 생각한다. 아침이 지나면 낮이 오고, 한 해가 지나면 또 새로운 해가 오는 것처럼, 시간은 ‘자연적 질서’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이 익숙한 전제를 아주 과감하게 뒤집는다.
그의 핵심 주장은 단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시간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낸 감각의 구조다.
이 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매클루언에게 시간은 기술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조화되는 경험적 형식이며,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미디어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1. 문자 이전 사회의 시간: 순환과 동시성
문자가 등장하기 전의 사회에서 시간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직선적 형태와는 전혀 달랐다. 매클루언은 원시적 사회의 감각 구조를 ‘순환적’이고 ‘동시적’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신화적 의례나 주술적 반복은 매년 동일한 사건이 재연되면서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이때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처럼 반복되고, 사건들은 서로가 서로와 동시에 연결된다.
이러한 시간 경험은 공동체 중심적이며, 청각·촉각적 감각이 우세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문자 이전 사회의 인간은 세계를 연속적 과정이 아니라 총체적 장(場)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 2. 음성 알파벳의 등장: 선형적 시간의 탄생
매클루언이 가장 강조하는 기술은 단연 음성 알파벳(phonetic alphabet)이다. 그는 알파벳이 인간의 시각 감각을 폭발적으로 강화시켰고, 이 시각 중심성은 곧 “선형적 사고”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알파벳 문자란 소리를 분절된 기호로 해체하고, 이를 일렬로 배열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체계다. 이러한 배열 방식은 인간의 인지를 ‘순차적’으로 만들고, 선후 관계를 중요하게 만들며, 논리적 전개의 토대를 제공한다.
바로 여기서 직선적·일방향적 시간 개념이 생겨난다.
문자를 갖게 된 인간은 더 이상 신화적 순환 속에서 사건을 반복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대신 “과거 → 현재 → 미래”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시간 체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시간은 정돈되며, 질서화되고, 인간의 삶은 원환적 구조에서 탈피하여 계획과 진보의 개념을 갖게 된다.
🕰 3. 인쇄술과 시계: 시간의 기계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문자 시대의 시간 개념은 한층 더 강화된다. 인쇄술은 문자를 대량생산하며 모든 사고를 더 정교한 선형성으로 조직한다.
여기에 기계 시계의 등장은 시간을 측정 가능한 ‘양’으로 바꿔 놓는다. 초, 분, 시간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시간은 더 이상 자연의 흐름이 아니라 기계적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분절된 단위가 된다.
이로써 시간은 인간의 삶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 산업혁명은 시계 시간에 따라 노동을 조직했고
- 학교와 공장은 벨 소리로 하루를 분할했으며
- 경제는 ‘시간=돈’이라는 등식을 믿기 시작했다.
매클루언이 시계를 ‘의상(costume)’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 있다. 시계 시간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에게 입힌 외피라는 것이다.
⚡ 4. 전기 미디어의 도래: 동기화와 초동시성의 시대
전기 기술이 등장하자, 인쇄 시대의 선형적 시간은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는다. 전신(telegraph), 라디오, 텔레비전, 이후의 전자 미디어는 정보를 거의 즉각적으로 전달하여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전기 미디어는 시간을 다시 ‘동시성’으로 돌려놓는 듯 보인다. 하지만 매클루언은 이것이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시간을 ‘동기화(synchronization)’라고 부른다.
- 네트워크의 모든 지점이 동시에 반응하고
- 정보가 실시간으로 순환하며
-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 인간의 활동이 하나의 전자적 리듬에 맞추어 움직인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림’이나 ‘단계적 흐름’으로 시간을 이해하지 않는다. SNS 알림, 실시간 스트리밍, 글로벌 시장의 24시간 정보 교환 등은 모두 전기 시대적 시간 감각의 현대적 구현이다.
🎯 5. 매클루언 시간 이론의 핵심 메시지
매클루언의 시간 개념은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기술과 인간의 감각, 사회 구조의 관계를 해명하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핵심 명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시간은 본질적으로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다.
- 미디어가 바뀌면 시간의 체험 방식도 바뀐다.
- 문자와 인쇄는 선형적 시간, 전기 미디어는 동시적·네트워크적 시간 경험을 만든다.
- 우리는 ‘자연적 시간’이 아니라 기술이 조성한 시간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이 관점은 우리가 스마트폰과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더욱 중요해졌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시간은 순간적이고 동시적이며, 여러 층위가 겹쳐진다. 매클루언이 말한 “전자적 동기화”는 이미 우리의 일상 그 자체가 된 셈이다.
✨ 맺음말
매클루언의 시간 개념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는 시간을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미디어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경험의 틀로 보았고, 그 관점은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시간 감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우리가 시간을 마주하는 방식은 우리의 기술 환경과 함께 계속 변해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 또한 새로운 미디어가 어떻게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